호소노 나가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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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소노 나가요시는 일본의 법조인으로, 교토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판사로 임관했다. 1946년 대심원장에 취임하여 사법 개혁을 추진하려 했으나 보수파와의 갈등을 겪었다. 1947년 일본국 헌법 하의 최고재판소 재판관 인선 과정에서 낙선하고 최고재판소 장관 대행을 맡았으나, 가타야마 내각의 재판관 임명 자문 위원회 위원 선거에서 패배하여 재판관 후보에서도 제외되었다. 결국 1947년 8월 재판관 직을 사임하고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1950년 사망했으며, 훈1등 서보장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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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소노 나가요시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호소노 나가요시 |
| 원어명 | 細野長良 |
| 출생일 | 1883년 1월 7일 |
| 출생지 | 도야마현 |
| 사망일 | 1950년 1월 1일 |
| 사망지 | 도쿄도 |
![]() | |
| 학력 | |
| 출신교 | 교토제국대학 법과대학 |
| 경력 | |
| 직책 | 대심원장 |
| 대심원장 대수 | 제23대 |
| 대심원장 임기 시작 | 1946년 2월 8일 |
| 대심원장 임기 종료 | 1947년 5월 3일 |
| 대심원장 임명자 | 쇼와 천황 |
| 대심원장 전임자 | 시모야마 세이치 |
| 대심원장 후임자 | 자신 (최고재판소 장관 대행) |
| 직책2 | 최고재판소 장관 대행 |
| 최고재판소 장관 대행 임기 시작 | 1947년 5월 3일 |
| 최고재판소 장관 대행 임기 종료 | 1947년 8월 4일 |
| 최고재판소 장관 대행 임명자 | 쇼와 천황 |
| 최고재판소 장관 대행 전임자 | 자신 (대심원장) |
| 최고재판소 장관 대행 후임자 | 미부치 다다히코(최고재판소 장관) |
| 기타 | |
| 서훈 | 훈1등 |
2. 생애 및 경력
도야마 현립 도야마 중학교를 중퇴하고 구제 제육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08년, 교토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1918년 도쿄고소원 판사가 되었다. 히로시마고소원 원장으로 재직 중이던 1944년 2월 도조 연설 사건에 대해 사법권 독립 침해와 헌법 위반에 항의하는 의견서를 제출했다.[1][2]
일본국 헌법 하에서 새롭게 구성되는 최고재판소 재판관 인사를 둘러싸고, 이전부터 사법권의 독립을 요구해 온 호소노 나가요시를 중심으로 하는 호소노 파와 그를 반대하는 반(反)호소노 파 간의 파벌 대립이 일어났다.[8] 제1차 요시다 내각에 설치된 재판관 임명 자문 위원회 위원이었던 호소노는 "도조 연설 사건에 대해 자신이 항의하는 의견서를 제출했을 때 중책을 맡은 감독적 직위에 있으면서 한마디도 항의를 하지 않은 자는 최고재판소 재판관의 자격을 결여한다"고 연설하며 재판관 선출 기준을 정할 것을 제안했지만, 난바라 시게루 위원 외에는 동조자가 없어 기각되었다.[8] 곧바로 최고재판소 재판관 후보자를 30명으로 압축하는 투표가 실시되었고, 호소노는 낙선했다.[9]
최고재판소 재판관 인선에서 탈락한 호소노는 1947년 8월 4일에 재판관 직을 사임했다.[12] 이는 1947년 8월 4일까지 최고재판소 재판관 대행(대심원 판사)으로 사직한 자는 대심원 판사로서 재판관 생활을 끝낼 수 있지만, 다음 8월 5일부터는 재판소 시행법 제3조 제1항의 규정에 의해 도쿄 고등재판소 판사로 강등되기 때문이었다.[12][13] 퇴임 후에는 도쿄 마루노우치에 사무소를 두고 미야기와 함께 변호사 사무소를 개업했다.[14]
[1]
서적
夏樹、2012年
1946년 2월, 이와타 츄조 사법대신의 추천으로 제23대 대심원장에 취임했다.[3][4] 호소노는 이와타 대신과 사법권 독립에 대해 뜻을 같이했으며,[5] 일본 사법 개혁에 의욕을 가진 GHQ 민정국 사법법제과 과장 알프레드 C. 오플러와도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6] 그러나 이와타가 공직에서 추방되고 후임으로 보수파인 키무라 아츠타로가 취임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키무라는 호소노에 반대했고, 중립적인 입장이었던 타니무라 이치로 사법차관도 호소노를 반대하여, 호소노는 사법성 최고 간부들과 사법 개혁을 두고 대립하게 되었다.[7]
1947년 일본국 헌법 하에서 최고재판소 재판관 인사를 둘러싸고, 호소노를 중심으로 하는 파와 반대파 간의 대립이 발생했다. 제1차 요시다 내각의 재판관 임명 자문 위원회 위원이었던 호소노는 "도조 연설 사건에 대해 항의하지 않은 자는 최고재판소 재판관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며 재판관 선출 기준을 제안했지만, 난바라 시게루 위원 외에는 동조하지 않아 기각되었다.[8] 이후 최고재판소 재판관 후보 30명을 뽑는 투표에서 호소노는 낙선했다.[9] 그러나 더글러스 맥아더 연합군 최고사령관은 제1차 요시다 내각의 인사를 백지화하고, 가타야마 내각의 재판관 임명 자문 위원회에서 다시 논의하도록 지시했다. 1947년 5월 3일 일본국 헌법 시행 당시 최고재판소 재판관과 최고재판소 장관이 임명되지 않아, 호소노는 재판소 시행령에 따라 최고재판소 장관 대행을 맡았다.
가타야마 내각의 재판관 임명 자문 위원회 위원 선거에서 호소노 파는 불리한 상황에 놓였다. 반호소노 파의 비방과 가짜 전보 사건까지 발생하면서,[10] 호소노 파는 위원회에서 영향력을 잃었고, 결국 호소노는 최고재판소 재판관 후보에 포함되지 못했다.[11]
결국 호소노는 1947년 8월 4일 미야기와 함께 재판관 직을 사임했다.[12] 이는 재판소 시행법에 따라 도쿄 고등재판소 판사로 강등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선택이었다.[12][13] 퇴임 후에는 변호사로 활동했다.[14]
1950년 1월 1일, 66세로 사망했으며, 같은 날 훈1등 서보장을 수여받았다.
3. 최고재판소 재판관 인선 과정
그러나 연합군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최초의 최고재판소 재판관은 신헌법 하에 선출된 최초의 내각에 의해 지명·임명되어야 한다"는 서한을 보내 제1차 요시다 내각의 인사는 백지화되었고, 일본국 헌법 하에서 처음으로 탄생한 가타야마 내각의 재판관 임명 자문 위원회에 의한 인사가 논의되게 되었다.
가타야마 내각의 재판관 임명 자문 위원회에서는 15명의 위원 중 4명은 "전국의 재판관으로부터 호선된 자"가 선출되게 되었고, 위원 선거는 반호소노 파 4명과 중간파 1명이 나오는 가운데 호소노 파는 미야기 미노루(대심원 판사)를 옹립하여 총 6명에 의한 4개의 의자 쟁탈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반호소노 파로부터 호소노를 비방하는 괴문서가 유포되었고, 선거전 종반에는 중간파로 옹립되었던 재판관에 대해 자신이 사퇴하겠다는 반호소노 파가 타전한 가짜 전보 사건까지 발생했다.[10] 위원 선거 결과, 호소노 파의 미야기가 낙선하면서 호소노 파는 재판관 임명 자문 위원회에 대한 영향력을 잃게 되었고, 재판관 임명 자문 위원회가 결정한 30명의 최고재판소 재판관 후보에 호소노는 포함되지 못했다.[11]
4. 퇴임과 죽음
1950년 1월 1일, 66세로 사망했다. 같은 날, 훈1등 서보장을 수여받았다.
참조
[2]
웹사이트
富山高校人物伝|富山高校同窓会
http://www.toyama-ta[...]
2024-12-21
[3]
간행물
『官報』第5274号、昭和21年2月14日、p.89
https://dl.ndl.go.jp[...]
[4]
서적
山本、1997年
[5]
서적
山本、1997年
[6]
서적
山本、1997年
[7]
서적
山本、1997年
[8]
서적
山本、1997年
[9]
서적
山本、1997年
[10]
서적
山本、1997年
[11]
서적
山本、1997年
[12]
서적
山本、1997年
[13]
법령
裁判所法施行法第三条
https://laws.e-gov.g[...]
[14]
서적
山本、1997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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